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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불안의 시대, 왜 금값은 오히려 떨어지는가

by jelpink2018 2026. 4. 11.

상식을 배반하는 시장

경제가 흔들리면 금을 사라. 전쟁이 나면 금이 오른다. 이것은 오랜 세월 투자자들 사이에서 불문율처럼 통용되어 온 공식이었다. 금은 어느 나라의 신용에도 기대지 않는 실물 자산이고, 어떤 통화가 휴지 조각이 되어도 그 자체로 가치를 유지한다는 믿음이 그 공식의 근거였다. 실제로 역사는 이 믿음을 여러 차례 입증해왔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금값은 폭등했고, 2020년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도 금은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데 2026년 현재, 이 오래된 공식이 삐걱거리고 있다. 금 가격은 1월 29일 온스당 5,602달러라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뒤, 60일 만에 1,100달러 이상 하락했다. 이는 중동에서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벌어진 17%의 급락이다. 중동에서 미국과 이란 사이의 무력 충돌이 현실화되고,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고,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훌쩍 넘어서는 상황에서도 금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직관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복잡한 속내를 차근차근 들여다보려 한다.


금값을 짓누르는 네 가지 힘

1. 연준의 매파 전환 — 금값의 첫 번째 방아쇠

금이 오르려면 달러의 힘이 빠져야 한다. 그리고 달러의 힘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즉 연준의 금리 정책이다. 금리가 높으면 달러는 강해지고, 수익을 내지 못하는 자산인 금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반대로 금리가 낮아지면 금은 빛을 발한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시장의 기대는 분명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2026년 중 최소 두 차례의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동 전쟁이 불을 뿜으면서 유가가 급등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유가는 인플레이션을 고착화시켰고,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3월 회의에서 2026년 예상 금리 인하 횟수를 3회에서 단 1회로 대폭 축소하는 조치를 취했다. 10년물 미국 국채 실질 수익률은 2.08%까지 치솟았다.

쉽게 말해, 전쟁이 오히려 연준에게 금리를 낮출 명분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유가 상승은 에너지 비용을 통해 모든 물가를 끌어올리고, 그 인플레이션 압력을 잡아야 하는 연준은 금리를 내리기는커녕 긴축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금값 하락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2. 달러 초강세 — 글로벌 수요를 옥죄다

금은 전 세계 어디서나 달러로 거래된다. 그렇기 때문에 달러가 강해지면, 다른 통화를 가진 전 세계 투자자들 입장에서 금을 사는 데 더 많은 돈이 든다. 수요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달러 지수는 2022년 말 이후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 금과 급등하는 달러는 공존하기 어렵다. 달러 강세는 유로, 엔, 위안화를 보유한 구매자들에게 달러로 표시된 금괴를 더 비싸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이 매파 성향으로 알려진 케빈 워시를 새 연준 의장으로 지명할 것이라는 관측이 시장에 퍼지면서 달러는 추가 강세를 보였다. 이러한 행보는 공격적인 연내 금리 인하 기대감을 사실상 위축시켰다.

달러 강세는 단순히 금의 가격을 높이는 것을 넘어, 이미 금을 보유하고 있던 외국 투자자들로 하여금 차익 실현 매물을 내놓게 만들기도 한다. 달러로 표시된 자산 가치가 자국 통화 기준으로는 오히려 높아 보이기 때문에 팔고 싶은 유인이 생기는 것이다. 수요는 줄고 매물은 늘어나니, 가격이 버티기 어렵다.

3. 마진콜의 연쇄 — 금이 현금이 되는 순간

조금 더 구조적인 문제로 들어가 보자. 현대 금융 시장에서 많은 투자자들은 레버리지, 즉 실제 가진 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빌려 투자한다. 금값이 5,600달러를 돌파할 무렵, 시장에는 이런 방식으로 공격적으로 금을 사들인 투자자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하면, 증거금이 부족해진 투자자들은 강제로 포지션을 청산당한다. 이른바 '마진콜'이다. 가진 돈보다 몇 배어치 금을 산 투자자들이 많았는데, 가격이 갑자기 하락해 이런 투자자가 맡긴 증거금을 넘어서게 되면 금을 강제로 팔게 된다. 그런데 이 강제 매도가 또 다른 가격 하락을 만들어내고, 그 하락이 또 다른 마진콜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금은 안전자산이 아닌 현금 확보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는 단순한 가격 조정이 아니다. 패닉이 패닉을 낳는 구조적 붕괴에 가깝다. 더군다나 주식 시장까지 흔들리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손실을 메우기 위해 가장 유동성이 높은 자산부터 팔려 한다. 금처럼 시장이 크고 24시간 거래되는 자산은 그 첫 번째 희생양이 되기 쉽다.

4. 공급 측 압력과 예상치 못한 변수들

인도 소비자들은 공식 부문에서만 200톤이 넘는 금 장신구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는데, 만약 글로벌 경기침체가 인도를 덮쳐 금 담보 자산의 강제 매각이 일어난다면 시장에는 예상치 못한 공급 폭탄이 투하될 수 있다. 이처럼 수요 측면의 위축 외에도 예상치 못한 공급 증가 가능성이 금값 상단을 막는 또 하나의 변수로 잠재해 있다.

결국 지금의 금값 하락은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연준의 매파적 기조, 달러 강세, 레버리지 청산에 따른 연쇄 매도, 그리고 공급 측 불확실성이 한꺼번에 맞물린 복합적 결과다. 이번 금값 급락은 에너지 가격 급등과 인플레이션 우려, 중앙은행의 관망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전쟁이 금을 띄워야 한다는 공식은, 그 전쟁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연준의 손발을 묶는 역설적 상황 앞에서 힘을 잃었다.


금의 신화는 끝났는가

그렇다면 이것이 금이라는 자산 자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신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지금의 하락은 금의 본질적 가치가 훼손된 것이 아니라, 현대 금융 시장의 구조적 메커니즘이 빚어낸 일시적 역설에 가깝다.

UBS는 최근의 변동성을 "체제 변화라기보다는 재조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며, 올해 미국의 추가 금리 인하 2회 예상과 함께 중앙은행 및 ETF의 지속적인 견고한 수요가 이를 뒷받침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UBS는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2026년에 2025년 수준과 비슷한 약 950톤의 금을 매입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중국 중앙은행은 15개월 연속 금 매입을 이어갔다. 각국 중앙은행이 이 가격대에서도 꾸준히 금을 사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금의 장기적 가치에 대한 기관들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이번 사태에서 배워야 할 진짜 교훈은 이것이다. 금은 안전자산이지만, 그 '안전'의 의미는 단기 가격 방어가 아니라 장기적 가치 보존에 있다. 단기 시장에서 금은 금리, 달러, 레버리지, 심리라는 네 개의 파도에 격렬하게 흔들릴 수 있다. 경제적 혼란이 반드시 금값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공식은, 적어도 그 혼란이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혼란'일 때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금이 약해진 시대가 아니라, 금을 단순하게 읽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정학과 통화정책과 레버리지 구조가 뒤엉킨 이 복잡한 시장에서, '전쟁 나면 금 사라'는 오래된 격언은 이제 하나의 참고 자료일 뿐이다. 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금을 둘러싼 세상의 복잡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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